중경 젊은이가 한국 선무의 유일한 외국인 제자가 되어 중한 문화교류의 다리를 놓다

2005년, 장위는 중경 1 중학교를 졸업한후 중경공학원 (현재의 중경리공학대학)에 입학하여 재무관리를 전공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뒷길을 막히고 먼 곳에 가서 공부하다

2005년, 장외는 중경 제1 중학교를 졸업한후 중경공학원 (현재의 중경리공대학)에 입학하여 재무관리전공을 공부했다.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줄곧 소년궁전에 가서 피아노와 춤을 배우고 싶었지만 가족들은 남자아이인 내가 이런 것들을 배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03년에 양려평선생님이 직접 공연한 ≪ 운남영상 ≫을 보은후 민족문화가무에 대한 사랑과 숭경이 더욱 커갔다.장위는 공무원 가정에서 태여났으며 부모도 그가 안정되고 체계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소학교, 고중, 대학교까지 장위는 부모의 요구에 따라 열심히 문화과목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는 자신에게 속하는 꿈이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았다.

2006년, 대학 1학년이던 장위는 한국의 부산대학교와 중경대학교에 학생교류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밖으로 나가 밖을 보고 싶은 충동을 더는 참지 못한 그는 슬그머니 원서를 내고 퇴학수속을 밟고 부산대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뒷길을 끊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다.이미 퇴학 수속을다 마쳤기 때문에 부모도 어쩔 수 없이 지지하다.출국전 장위는 조천문에 가서 80 켤레의 양말과 대량의 생활용품을 도매했으며 4년 동안 귀국하지 않고 반드시 공을 세워 돌아올 작정이였다.장위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자신에게 말했다.

부산에 처음 왔을 때, 모든 것이 장웨이에게는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특히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부산에 와서 바다를 보았을 때는, 자신의 애인과 손을 잡고 모래밭에서 달리는 것을 동경했다.한국어를 몰라 장위는 영문전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영어공부는 기초가 있고 장학금도 비교적 쉽게 받을수 있다고 했다.

많은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모두 한국어로 말하는데 장위는 알아듣지 못했고 수업시간에도 눈을 뜨고 선생님을 바라보기만 했다.이 일을 알게 된 선생님은 전문 언어선생님을 찾아 개인적으로 장위의 한국어를 지도해주었다.

장웨이는 현지인 집에서 월 10만원의 숙식과 인터넷을 제공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국어를 배우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대학 내 캠퍼스 식당에서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해 돈도 벌었고, 한국인 아줌마들을 사귀며 부산 사투리를 익혔다.약 반년 만에 장웨이는 한국어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됐다.

그뒤 뜻하지 않은 일이 장웨이에게 찾아왔다.2007년 11월 17일,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1 킬로메터 달린후 장외는 차사고가 발생하여 왼쪽어깨가 골절되고 못이 5개 박혔다.가족에게 좋은 소식만 알리고 나쁜 소식은 알리지 않는 그는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았다.45일간 입원했는데 한국학생의 부모가 그를 도와 입원비를 해결해주었다.한 사람이 병원에 눕자 같은 병실에 있던 한국인 친구의 가족들이 화장실로 부축해 가며 반찬을 가져다줬다.장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울물의 은혜는 용천에서 갚아야 한다.이 사랑은 나로 하여금 감사함이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는것을 알게 했다.

퇴원후 장위는 자원봉사자로 신청하여 부산 현지의 각종 행사와 축제에 자주 참가하였으며 자신의 중국어, 영어, 한국어를 아는 장점을 이용하여 통역 봉사를 하였다.1년 동안 그는 30여개 항목의 사회자원봉사사업을 했다.부산 영화의 전당, 용두산공원, 부산문화회관, 해운대 등지에 대한 중국어 안내, 자료 등을 그가 번역하고 썼다.2009년, 뛰어난 업무로 장위는 부산 명예 외국인으로 수여되었다.

은사를 만나 어릴적 예술의 꿈을 이루다

2008년 6월 부산 국제무용제. 대학 3학년인 장웨이는 11개국 초청 손님들의 통역 조정 업무를 맡아 통역 팀장을 맡았다.장웨이의 뛰어난 활약은 당시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한국 선무 창시자 이윤자 부산대 교수의 주목을 받았다.7월, 리교수는 항저우로 출장을 갔는데 장웨를 가이드로 지명하였다.항저우 일행에다 장위의 해설까지 곁들여져리 교수 일행의 중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인상을 바꿔놓았다.

내가 한국에 온지 3년이 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이 교수님은 너는 집이 그립지 않지만, 부모님은 네가 무척 보고 싶다며 나에게 말씀하셨다.리교수는 즉석에서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장위더러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찾아뵙게 했다.2008년 7월, 그는 한국에 온지 3년 만에 고향 충칭으로 돌아왔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장웨와리 교수와의 교류는 점점 많아졌고,리 교수는 그를 데리고 많은 사교활동에 참가했다.이뿐만 아니라 리교수는 그에게 선무를 배우게 했다. 장위는 어린 시절의 예술 꿈을 한국, 부산에서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뻤다.현재,이 예술의 길은 장위가 이미 근 10년을 걸어왔다.

비록 중도에 출가했지만 어릴 때부터 기본기를 련마하지 못했고 다행히 스스로 노력한데다가 자신의 오성도 비교적 높아 장위는 아주 빨리 길에 올랐다.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이해력이 높다.같은이 교수의 제자인 부산대 강미선 교수는 장웨를 이렇게 말한다.강미선선생님의의견에는무용은신체예술의표현일뿐만아니라깊은문화적인내용을기초로할수밖에없다. 한국문화와중국문화는많이깊다. 장웨이는영리하고손재주있으며문화적우위가있다. 한국전통무용을배우면입문이빠르고진보가크다.

어느 날 주말, 리교수는 장위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있어 즉시 서울로 가라고 했다.원래 그날 장위도 일이 있었는데 교수의 전화를 받고 즉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급히 서울로 갔다.도착해서야 그는 교수님이 여러 제자에게 전화를 했는데 모두 일이 있어 갈수 없었고 장위만 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후에 교수는 옥석증표 하나를 장위에게 증여하였다.

당시 장위는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몰랐지만 매우 귀중하다는 것만 알았다.후에 부산으로 돌아온후 다른 선생님들이이 고옥을 보고 장외에게 그것은 신임을 상징한다고 알려주었다.장위가 선무의 전승자로 한국 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전승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교류를 촉진하여 중한 문화 교류의 다리를 놓다

부산 국제 무용제, 부산 예술제, 중국 쿤 (昆舞) 국제 심포지움 등 국내외 문화교류 행사를 거친 후, 난징 (南京) 예술학원 무용 학원의 초대 원장이자 국가 1 급 안무가이자 쿤 (昆舞) 창시자인 마자친 (馬嘉親) 교수가 장웨이를 알게 되었다.여러번의 접촉을 통해 마교수는 장웨와 의미심장하게 교류했다. 비록 몸은 한국에 있지만 장웨는 중국문화의 보호와 발전에 지혜를 바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쿤 (坤) 무는 마가친 (馬家흠) 교수가 처음 창안한 것으로, 중국 고전 무용에서 희곡신운무, 한당무, 돈황 (敦煌) 무의 3대 유파에 이어 네번째로 큰 유파가 되었다.

2015년, 쿤밍무용은 국가예술기금 인재양성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신청했고 장위도 여기에 참여했다.마 교수의 조수로서 그는 쿤무 개론의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것을 열심히 돕다.올해 들어 장웨는 중국에 5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신장의 대극장을 관람하고, 윈난의 윈난인상을 관람하고, 쑤저우의 쿤밍 (昆明) 무용 발원지를 방문했으며, 난징의 도화선 (桃花선)과 모란정 (木丹亭)을 탐문했다.

쿤밍 (昆明) 춤 자료 외에도 장웨이는'천수관음','윈난인상'등의 자료를 번역하여 해외 간행물에 게재하고 전파했다.고향의 대족석각, 천갱지하틈새, 백제성 등 자연인문경관에 대해서도 그는 한국 친구들에게 자주 추천하고 그들이 중국에 많이 가서 둘러보고 가라고 격려한다.

현재 부경대에서 국제지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그는 기자에게 자신은 중국과 한국의 문화를 위해 교류와 전파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장웨이:중국과 한국의 문화 교류를 위해 다리를 놓고자 합니다

장웨이, 29세, 중경시 유북출신,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 박사, 부산시 명예 외국시민이며, 한국의 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유일의 외국 전승자.

[충칭조보] 한국 승무의 유일한 중국 전승자는 중경 젊은이입니다

장웨이는 현재 부경대학에서 국제지역학을 전공하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한국에 온지 근 10년, 그의 경력은 아주 드라마적이다:한국에 와서 배운 것은 영어이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또 중국어 번역에 종사한다.우연히 한국 전통무용의 대가를 만나 마침내 전수해 한국 무형문화유산인 승무 (승무)의 유일한 중국 전승자가 되었다.

기사 주소: https://tropeanddagger.com/artdetail-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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